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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회오리> & <완월> - 한국적 현대무용의 대안 제시, 더 많은 산통 따라야
  • 기사등록 2015-11-09 08:57:23
  • 수정 2017-10-31 14: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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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은 움직이고 있다. 오랜 기간 남산자락에서 쉬고 있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국립’은 그래야 맞다. ‘칸’으로 가는 <회오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음악가 장영규가 춤을 만든다고 해서 10월 9일 국립극장을 찾았다. 


 재공연 작품인 <회오리>(국립극장 해오름극장)는 지난해 초연 후 ‘한국적 현대무용의 성공작’이라는 평과 ‘그렇지 않다’는 평이 공존한 작품이고, <완월>은 무용을 모르는 음악가가 연출을 한다고 해서 그 궁금증은 배가되었다. 작품이 좋던 나쁘던 화제를 생산했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다. 관객을 극장으로 올 수 있게 하는 마케팅은 도시를 활기차게 한다. 궁금증은 창조적 삶의 바로미터다. 


 작품을 보기 전부터 음악가 장영규는 궁금증의 대명사였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비빙’의 장영규는 실망을 주지 않았다. 한국춤에 비해 한국전통음악의 현대화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안무가의 입장에서 본 <회오리>와 <완월>은 동서양을 접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한국무용계의 현주소를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손의 에너지와 한국적 감성이 더해진다면--- <회오리>

 

   <회오리>는 동양적 정서를 가진 핀란드 안무가(테로 사리넨)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정서적 일치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장영규의 라이브 음악은 전통을 현대화했다는 느낌에 덧입혀 토속적 정서의 현대화라는 내밀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주의적 색채를 추구하는 안무자 테로의 요구와 부합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테로의 안무는 서구의 눈으로 한국을 본 안무자의 시각이란 느낌이 완연했다. 테로는 성실하고 치밀하게 한국적 움직임을 연구했고 일정부분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더 깊은 기와 묵묵함과 같은 동양적 우수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흉내 내기는 어려웠다. 


 <회오리>는 2가지 점에서 한국적 정서를 비껴갔다. 먼저, 몸 에너지의 활용이다. 다리를 벌려 중심을 아래로 내려 기(氣)가 위로 솟는 것을 막으면서 동작의 확장을 유도하는데 까지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춤의 확장을 위해 온 몸에 힘이 들어간 동작에서 한국춤이 가진 에너지의 활용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춤에서 손은 중요한 표현 도구다. 장구를 칠 때 손으로 장구를 치는 것만큼이나 소리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조절해주는 손가락의 열림과 닫힘, 그리고 손의 힘과 무게감, 가야금 줄을 온 몸으로 누르면서 음 조절을 하는 손의 악력 등 손바닥과 손끝은 에너지를 조절하는 조리개 역할을 하기에 몸의 끝인 손은 춤에서 중요하다. 손가락 끝을 살짝 모았다 폈다 하면서 힘 조절을 하는 손은 기를 담거나 흐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몸 안의 에너지와 몸 밖의 에너지를 합치시키거나 연장하거나 닫을 때도 중요하다. 손이 부드러우면서 손끝이 야무져야 춤집이 좋다고 한다. 


 한국의 무용수들이 좋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무용수들에게는 감성적이고 에너지의 흐름을 잘 감지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 이는 전통춤에서 깊이를 획득하고 현대춤에서 기교를 장착했기 때문이다. 국립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최고의 움직임을 자랑한다. 무용수들이 안무가 테로의 독특한 움직임 스타일을 배운 것은 실보다 덕이 더 많을 것이다.






   다음으로, 테로의 작품은 아름다운 선과 다양한 움직임, 그리고 화려한 무대구성이 관객을 충분히 사로잡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호평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심심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안무가 부족하거나 무용수의 움직임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한국적 정서의 깊이를 잘 모른다. 맵고 짜고 강하고 깊은 정서, 그런 정서가 판소리를 만들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드라마를 세계화했다. 휘몰아치는 강열함과 그 다음에 오는 먹먹함, 그리고 애절함.
 
 춤에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가진 감정의 진폭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살풀이는 울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에서 그리고 춤에서 알 수 없는 먹먹하고 진한 은유가 있다. <회오리>의 시놉시스는 동양적 정서로 가득하고 음악 또한 한국의 토속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조명 또한 강렬하고 진폭이 급격하다. 움직임 또한 강하면서 부드러우며 진폭이 있다. 

 그런데 왜 작품에서는 이런 면이 희석되고 있는가? 이는 바로 춤의 흐름 때문이다. 그 흐름이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안무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비슷한 패턴의 흐름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안무자의 정서에 부합하는 흐름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은 가장 드라마틱하다. 드라마를 특별히 갈구하지 않아도 춤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몸으로부터 흐르게 한다. 춤은 몸으로 말을 하고 몸으로 감정을 구사하며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이다. <회오리>에서 자연은 있었으나 드라마가 강렬하지는 않았다.


이지적인 강강술래의 해체, 유연한 몸의 흐름이 동반된다면--- <완월>


 초연 무대인 <완월>(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은 한국적 정서로 서양의 옷을 입힌 작품이었다. 달이 차고 기우는 순환의 의미는 동양사상의 근간이며 근원적 인식의 원형이다. 강강술래는 달밤에 이루어지는 여인의 몸짓이며 원시적 움직임을 기호화한 추상적 의미체이다. 삶의 모습을 몸짓기호로 의미화한 이 춤의 원형은 단순하면서도 치밀하며 움직임 곳곳에 상징과 은유가 풍성하다. 반복과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강술래의 구성은 좌우로 엮고 엮이고 풀고 풀리는 매듭처럼 다양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 중에 <강강술래>가 있다. 그 <강강술래>는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인 송범의 창작품이다. 송범은 강강술래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했다. 그 작품에는 여인, 달, 흐름, 분위기 등에 주안점이 가 있다. 송범의 <강강술래>가 원시적 원형을 낭만적으로 현대화하여 무대언어로 풀어냈다고 한다면 이번 국립무용단의 <완월>은 원형의 의미에 집중하고 분석적으로 재해석하여 지적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낸 컨템포러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영규(음악/연출)의 <완월>(구성 문창숙 김기범)에는 음악이 몸 위에 얹혀져있다. 당연히 음악가의 작품이기에 춤에서 음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몸 위에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음표가 되어 구성적 묘미를 풍겼다. <완월>은 가슴으로 느끼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묘미가 무대 전체를 휩쓰는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작품이다. 단순한 움직임을 기본으로 무한 변주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상수에서 3명의 무용수가 음악적 흐름에 따라 팔을 든다면 적절한 시간성을 가지고 하수에서 그 변주가 이루어진다. 시간과 공간은 계속 변화되면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고 흐름을 변형시켰다. 마치 음악 구성법을 춤에 적용한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 20,30분 정도는 그 다양함과 변화되는 변주를 살펴보느라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재미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는 지적관찰의 묘미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고 반복되는 상황이다가 바닥에 원을 그리거나 돌을 얹는 등 진부한 개념의 나열로 끝났다. <회오리>처럼 조금 섭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월>은 세 가지 점에서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첫째는 의상(홍소영)이다. 항아리처럼 생긴 바지와 버선, 그리고 몸에 딱 붙는 상의는 재미있는 컨셉트이다. 거기에 조바위와 비슷한 머리모양은 상당히 창의적이다.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화한다는 것은 끝없는 실험을 전제로 하고 그 실험은 당연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완월>의 의상은 과감하고 실험적이어서 좋았다. 둘째, 한국춤의 현대화에서 움직임에만 매달리지 않고 형식 즉, 방법론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춤은 방법론의 부재 속에서 허덕인다. 한국춤에 원래부터 방법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강강술래에는 다양한 구성의 방법들이 존재한다. 장영규는 강강술래의 반복과 변형을 그대로 차용하여 <완월>에서 새롭게 조합했다. 그것도 아주 이지적이고 분석적으로. 

 강강술래에서도 움직임은 다양하지 않으나 게임을 연상하게 하는 패턴과 공간적 변화로 인해 춤은 즐거운 유희이고 놀이다. <완월>에서 놀이는 사라졌지만 그 형식을 빌려와 구성적 묘미를 더했다. 

 마지막은 당연히 음악이다. 장영규는 <회오리>에서도 다양한 국악의 색체를 현대음악에 덧입혀 토속적이면서 세련됨을 선사했는데 <완월>에서는 무속적인 느낌의 무한반복 속에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급격한 리듬이나 선율의 변화는 없었지만 소소한 변주는 마치 최면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완월>이 비록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개념작업을 충실히 했다 하더라도 춤 공연은 춤이 재미있어야 한다. <완월>에서 가장 미흡한 부분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이 화려하거나 많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허리를 사용하지 않는 딱딱한 몸의 흐름은 차고 기우는 달의 의미와도 부합되지 않고 원형이 가진 강강술래의 낭창거리는 움직임과도 유리된다. 


 한국춤은 삼박의 흐름이기에 재즈와 비슷한 몸적 흐름이 있다. 그런 흐름이 사라진 <완월>에서의 움직임은 마치 로봇이 움직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는 이 작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다. 처음의 재미있는 구성과 다양한 움직임 패턴들이 점점 발전하고 확대되어 몸의 유형적 묘미로 옮겨졌다면 뒷부분의 지루함을 만회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춤 공연은 개념과 계산으로만 할 수 없는 감성과 기교의 복합체이다. 비록, <완월>이 지적 즐거움은 선사했지만 춤을 즐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회오리>와 <완월>은 한국적 현대무용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전통을 현대화한다는 것은 끝없는 실험을 전제로 한다. 국립무용단은 더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한다. 작품에 변화가 많다는 것은 무한변신을 위한 지각변동이라고 생각한다. 산통 뒤에 탄생할 국립무용단의 내일이 기대된다.

사진제공_국립극장 




손인영 기자 (iy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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